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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사람

불멸의 청년시인 윤동주

by 예준 파파 2016.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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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윤동주.

 

 

[윤동주와 정병욱]

 

약력

출생-사망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 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 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 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 시집, 1948)

 

시인 윤동주의 출생

윤동주 시인은 당시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에서 1917년 12월 20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파평(坡平)인 아버지 윤영석(1895년 음력 6월 12일 출생)은 그 당시의 상당한 인텔리였다. 그는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한 때 소학교 교편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1920년대엔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다시 유학을 하기도 했다. 시인의 어머니는 교육자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1862-1942) 선생의 누이였다. 김약연 선생은 당시 간도 주민들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이 고장 명동 소학교와 중학교 모두 그가 설립한 규암서숙이 모체가 되어 세워진 학교이다. 윤동주 시인은 원래 4남매였는데 아우 일주(一株)는 성균관대 교수로 일하다가 86년에 작고했으며 누이인 윤혜원(尹惠媛)은 월남하여 부산에서 거주하였고 아우 광주(光株)는 북에 남아 있어서 생사를 알 수 없다.

윤동주의 아명(兒名)은 해환(海煥), 아우인 일주는 달환(達煥), 그리고 막내 동생은 별환(갓난애 때 죽음)이었다. 이 아명은 모두 그의 아버지가 지은 것인데 자식들 이름 앞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지은 그의 부친의 정서적 일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출생지의 배경

시인 윤동주의 '동(東)' 자는 「명동」에서 따 온 것으로 그만큼 이 고장 명동에 대한 애착은 각별하고도 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66년 그의 증조부 윤재옥이 43세 때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 이끌고 북간도 자동(紫洞)으로 옮겨 온 후,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때에는 다시 명동촌으로 이사, 자수성가하여 가세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으며 윤동주 시인과 그의 동생들이 태어난 생가는 이 고장에서도 돋보일 만큼 큰 기와집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고장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리 만큼 그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도 이름난 곳이었다. 이 고장에 대한 그의 부친의 애착과 집념은 특별난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후일의 윤동주의 저항시인적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이 고장 명동촌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도 결코 군더더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자란 명동촌의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어주었다. 마치 존 키츠나 워즈워스의 고향이 그들의 시와 생애에 절대적 영향을 안겨주었던 것처럼...

 

항일 운동의 고장

당시에 명동 출신이라 하면 의례 배일(排日) 운동가의 낙인이 찍힐 만큼 삼엄한 대외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 평생 일본(日本)이라고 부르기가 싫어서 왈본(曰本)이라고 불렀던 지사(志士)들이 많았던 것도 그 고장의 개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문재린(文在麟), 윤영석(윤동주의 부친), 문성린, 김석환 등이 그들이었다.

북간도에서 '동만(東滿)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약연 선생이 터잡고 있던 명동은 한 시인의 풍운에 찬 생애를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고장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개화된 집안에서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나 외숙인 김약연 선생의 가르침과 영향을 크게 받았다.

3·1만세 후에 결성된 '북간도국민회'는 상해 다음가는 임시정부 구실을 했었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청산리(靑山里)대첩이 북간도국민회가 주도했으며 그 활약이 눈부셨다. 이 청산리 보복으로 일본군은 간도 지방의 우리 겨레 3만여 명을 무참히 학살한 일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을 태어나게 하고 그가 자란 지리적 상황 배경은 바로 이런 '역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그 정신적 배경에는 이토록 사무친 민족적 비애와 울분이 서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병욱씨의 회고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오똑하게 쪽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운 입술,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다고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라 천성으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눈 비가 내려도 태산처럼 요동하지 않는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주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이 없었고 CCC라는 글자가 새겨진 교복의 단추를 모로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의 두 반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 <중략>

우리가 다니던 교회는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협성교회로서 이화여전 음악관에 있는 소강당을 교회 당으로 쓰고 있었다. 거기서 예배가 끝나면 곧이어서 케이블 목사 부인이 지도하는 영어 성서반에도 참석하곤 했었다.

오늘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된 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동주가 심어준 씨앗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도 도주가 내 곁에 있는 것을 느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들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나를 이끌어 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 그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이지만, 가끔 입을 열면 고작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에 나는 무엇이라 대답했는지 뚜렷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그는 "그 책은 그저 그렇게 읽는 거예요."
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 책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라 무척 고생하면서 읽어도 잘 알 수 없는 책입니다." 이렇게 일러주기도 했다. 그만큼 독서의 범위가 넓었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했었다. 꼭 다문 입술을 팽팽히 조인 채 눈에서는 불덩이가 튀는 듯했었다.

 

 

악랄한 생체실험의 모르모트

전쟁 말기의 일제의 단말마(斷末魔)적 현상의 하나로 생체실험을 꼽을 수가 있는데 윤동주의 사인도 계속된 식염수 주사에 있다는 주장이 나와 이목을 끌었다.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한 일본인 유학생 코노에씨가 제출한 논문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가 그것이다. 매우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짐작의 불확실성을 넘어 정확한 논리와 고증으로 가려낸 '시인의 사인'은 퍽 생산적인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그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였건 간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생체실험'의 제물로 삼는다는 것은 일제의 잔인성을 다시 한번 온 세상에 폭로해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생체 실험의 모르모토'- 그 사실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그가 겪어야 했던 절망적인 말년의 상황이 한 번 더 후세의 독자들을 울리고도 남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결백, 이 순수, 이 열정의 기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던 날…… 시인의 눈은 차마 감기지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의 무덤은 북간도 뒷동산에 있다. (용정 동산) 세월이 흘러도 말이 없는 고독한 비목(碑木)―이제는 갈래야 갈 수조차 없는 금단의 지역이 된 그곳, 시인의 별은 북녘 하늘에 홀로 빛나고 있다.

그의 뜨거웠던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참뜻을 모르는 이에게까지도 그 무덤은 살아서 속삭이고 그의 시는 영원히 향수처럼 나부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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